top of page

초월 (경외) 과 내재 (관계) 의 사이에서

관계는 늘 상호적이다. 여자친구 없이 혼자 남자친구를 자처하는 것을 스토킹이라고 부르고, 국민이 없이 혼자 통치자를 자처하는 것을 독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통치자와 국민,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이들 모든 관계는 상호적으로 정의된다. 남편이 있기 때문에 아내가 있고, 국민의 동의가 있기 때문에 통치자가 존재한다. 이 관계성은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에 통한다. 부는 가난에 의해 정의되며, 온유함이라는 성품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성안에서 서로를 정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상호 정의성 혹은 관계성에서 홀로 초월해 계신 분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이시지만,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우리의 아버지 되어 주셨다. 가족이라는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정의하신 것이다. 절대적으로 스스로를 정의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스스로를 상호 정의 라는 틀안에 가두고 자기를 우리에게 드러내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없이도 전능하신, 인자와 긍휼 그 자체이신 분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어떤 것에 의존해서 증명되지 않는다 (비의존성). 그리고 그분은 자유하시다. 예를들면, 누구를 사랑하는 행동과 표현을 통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의 인자와 사랑은, 다른 이들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혹은 사랑받는 대상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성립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혹은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다." 라고 말하기보다 (물론 그렇게도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말씀한다. Rather than saying God HAS love, the Bible says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유와 비의존성 (liberty and independence) 에 관한 선언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제한하시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속에서 사랑이신 그분을 드러내셨다. 그 자체로 사랑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와 맺은 관계의 언약을 통해서, 사랑이신 그분을 증명하셨다. 이러한 상대적 방식의 사랑 혹은 관계적 사랑은, 수신자를 배려한 방식의 사랑이다. 절대적 진리를 깨닫는 것보다는 내가 경험한 것을 믿는 것이 훨씬 쉽다. 누가 천국에 다녀온 이야기 보다는 내가 받은 작은 기도의 응답이 훨씬 강력한 것처럼.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위해 해야하는 두 가지 일이 있다. 첫번째는 우리에게 허용하신 상호적 관계적 사랑을 적극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으로 우리가 자녀되는 이 특권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 바로 그안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그리고 사랑이신 하늘 아버지가 바르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자녀된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사용할 때, 하나님의 희생은 가치있는 일이 된다. 두번째는 그분을 다시 자유롭고 독립적인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인간으로 오셨지만 (vere homo 참 인간) 하나님이셨다 (vere deus 참 하나님). 인간으로 죽기까지 고통 당하셨지만, 부활하여 하늘 우편에 앉아계신다. 고난의 주로 오셨지만,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 베푸신 관계를 오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우리의 아버지이시지만 (내재),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다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초월).

Comentarios


@All Rights Reserved. 2023.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