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불안과 공포의 지배 하에 삽니다. 홉스는 이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라는 유명한 말로 요약했습니다. 규율도 없고 통제도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개인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대환장 상황이 "자연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한편 인간 모두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권리가 있는데, 이를테면 자유와 같은 것입니다. 홉스는 인간이 자연 상태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 권리를 희생하여 사회적 계약을 통해 국가를 탄생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욥기 41장에 나오는 리워야단(리바이어던)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에 자기 권리를 이양하고 국가가 제공하는 안전을 선택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홉스는 강력한 국가, 특히 현명한 인물이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제 국가를 신봉했습니다. 지혜로운 군주가 다스리는, 리워야단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를 이상적 상태로 본 것입니다.
욥기 41장에 하나님께서 리워야단에 대해 길게 설명하십니다. 의도는 10절에 나옵니다. "... 아무도 [리워야단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욥이 당한 상황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욥이 제기하는 신학적 질문도 타당해 보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의인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주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통치가 의롭다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어찌 이렇게 행하실 수 있습니까?' '왜 제게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실을 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욥의 상황이 안타깝고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담대하게 리워야단을 격동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맞지 않은 것 같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조금만 알 뿐이고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욥은 42장에 가서 자기가 앞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장 3절). NIV는 "... I spoke of ... things too wonderful for me to know(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제가 알 수도 없는 것들을 제 입에 담았습니다)"라고 풀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리워야단과 싸우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 공급망의 위기, 구인난... 어디 그뿐인가요. 건강, 가정, 자녀, 생업 등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 큰 일들 앞에 우리는 억울해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상황을 통해 문제를 초월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대항할 수 없는 리워야단을 애완동물처럼 다루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혹시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감히 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을 높여 드립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계획을 깨트리시고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뜻을 이루시옵소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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