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11-26, "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욥은 죽음을 동경합니다.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태어났더라도 사고가 있어서 고통을 모른채 일찍 갔더라면, 차라리 그게 나았을 것 같다는 겁니다.
사람은 언제나 가 보지 못한 길을 동경하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택한 길 혹은주어진 길과,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기회비용, 혹은 혹시라도 가능했을 새로운 길들을 비교하며, 언제나 동경합니다.
욥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삶 자체에 대한 기회비용 즉 죽음을 동경합니다. '과연 죽음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해 보면서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여러가지 묵상의 고리들을 남겨두고 제 눈은 20절에 멈추어 섰습니다. NRSV (영역 개역 개정판) 에는 20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Why is light given to one in misery, and life to the bitter in soul?" 직역하면, "왜 빛은 절망에 싸인 채 주어지는가? 왜 생명은 영혼의 고뇌에 차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가?"
인생에 대한 정말 절묘한 삶에 비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생명이 있지만 고뇌가 가득할 뿐이고, 빛은 있는 것 같지만, 절망에 잠겨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절망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영혼의 고뇌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절망이 가득한 세상 속에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고뇌가 가득한 인생 가운데 충만한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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