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여성 목사 안수의 성서적 근거

Updated: Oct 8, 2018

이 글은 여성 목사 안수의 성서적 근거를 논한다. 나는 각 교단의 상황과 신학을 존중한다. 가톨릭이라든지 보수 장로교 혹은 침례교 등에서는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복음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와 제도화 된 교회를 운영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본 글의 목적은 다만 “여성 안수는 악마적이다.” 혹은 “비 성경적이다." 라는 건설적이지 못한 논점에 대한 반박임을 밝혀둔다.


1. 막달라 마리아

초대교회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He is risen). 이 메세지는 교회의 선포 (케리그마) 의 핵심이었고, 교회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1차적 존재 목적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요한복음이 지목하는 첫번째 부활의 선포자가 여성 — 막달라 마리아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 20:17-18).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계시되었던 십자가 사건중에도, 남자였던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없었다. 여성들만이 주님의 마지막을 쓸쓸하게 지켰다 (요한복음만 요한 또한 주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다고 증거한다). 예수님께서 여성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첫번째 부활의 증인이 되라 명하셨다면, 부활을 선포하는 사명을 받은 주님의 교회 또한 여성들을 공동체의 으뜸가는 리더로 세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숙녀분들,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2. 초대 교회의 여성 지도자들

바울이 로마서 마지막 장에서 28명의 인물들을 언급하는데, 그 중 10명이 여성이다. 바울이 거명한 28명은 분명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을 것이다. 가정 교회의 목회자들이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큰 공동체의 사역자였을 수도 있다. 1) 1절과 2절에 나오는 뵈뵈 (영어로 Phoebe) 는 외지인으로 로마에 어떤 목적을 갖고 방문할 예정인 것 같다. 바울은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당부한다. 2) 3절과 5절 초반까지 나오는 브리스가도 유명한 인물이다. 브리스가 아굴라 라는 부부인데, 이 부부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부인의 이름이 남편의 이름 앞서 나온다. 3) 7절의 유니아도 여성이다. 안드로니고라는 남성과 함께 언급이 되는데, 바울은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말한다. “존중히 여겨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ἐπίσημος 라는 단어인데, 뒷 부분의 어원인 σῆμα 가 표 (mark) 혹은 표시 (sign) 라는 단어에서 온 것을 감안하면, remarkable 혹은 significant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탁월한 리더 혹은 눈 여겨 보아야 할 리더로 유니아라는 사역자를 소개하고 있다.


3. “돕는 배필” 로 인한 오해

창세기 2:18 에 나오는 표현으로, 아담을 위해 하와를 위해 지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랫동안 가정과 교회내의 여성의 역할을 보조적인 것으로 한정하는데 일조해 왔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이들의 논의에도 가끔 인용된다. 오해이다. 돕다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에제르인데, 구약 성경에서 여러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시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사무엘상 7장이 좋은 예인데, 블레셋을 격파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무엘이 기념비를 세운다. 그리고 그 바위를 “에벤에셀" 이라고 불렀다. 에벤은 바위를 의미하고, 에셀은 창세기 2장에 나온 에제르라는 단어이다. 에벤에셀이란 문자적으로 “힘이 되시는 바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레를 발하여” (삼상 7:10) 블레셋과 싸우는 이스라엘을 도와주셨다. 창세기 2:18 이 의미하는 여성들이 배우자를 돕는 역할 또한 이런 역할이다.


한 온라인 신문을 통해 한국의 한 대형 교회 목회자가 여성 안수에 대해 한 발언을 접하게 되었다. “역사를 보면 묘하게도 여성 안수가 허용되면 신앙은 자유주의로 치닫고, 교단의 색깔이 진보 쪽으로 기울게 되며 여성의 권익을 위한 페미니즘적 경향으로 가게 됐다." 이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성서 해석학의 큰 흐름을 보면, 대체적으로 성경의 저자들이 처했던 “그때 상황”에 대한 관심에서 독자들이 처한 “오늘의 상황”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왔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독자들이 가진 다양한 관심/상황으로의 물꼬를 튼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여성주의 성서해석이기 때문이다 (feminist biblical interpretations). 여성주의 성서해석 이후, 예를 들면 인종주의 성서해석 (racial-ethnic —), 혹은 탈식민주의 성서해석 (post-colonial —) 등이 더 진보적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저 목사님은 이런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데 500원 걸 수 있다.


나는 기독교 대한감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뼛속까지 감리교인이다. 한국 감리교회는 1931년에 법적으로 여성 안수를 허용했고, 1955년에 전밀라 목사라는 첫 여성 목사를 세웠다. 물론 그 이후에 안타까운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여성들에게 주신 목회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한 입장은 바꾸지 않았다.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다. 여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는 완전하고 끝까지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Comments


@All Rights Reserved. 2023.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