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은 바울은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나타나셨는지에 (theophany) 관해 이야기 한다. 자연스레 출애굽기 3장이 떠오른다. 모세도 바울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 [하나님] 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애굽기 3:13).
완곡하게 했지만, 정작 묻는 것은, “뉘십니까?” 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 시쳇말로 하면, “안얄랴줌”이다. “나는 나야 임마. 내 이름에 관해서 너는 알 필요도 없고, 나는 이름같은 것 있지도 않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인간의 모든 종교적 시도가 담겨 있다고 하면 무리일까. 너머에 계신 그 분을 어떻게든 한 개념안에 담아보려고 했던 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는 그 분을 어떻게든 한 이름안에 잡아 넣어 보려 했던 것이 종교아니었던가.
그러나 사도행전 26장의 “그 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맙소사. 신적 존재가 친절하게 자기 소개를 한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모습으로 오셨다. 우리 모두가 만질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분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가장 연약한 인간을 통해서도 완전히 증거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신적 현상, 즉 모세가 만났던 하나님과 정반대의 캐릭터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나사렛이라는 촌동네 목수의 아들로 자랐다. 세리와 매춘부같은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렸고, 당대 지도자들의 모든 미움을 한 몸에 샀다. 끝은 어땠는가. 로마 제국의 반동 분자로 몰려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출애굽기 3장의 신적 존재가 잡히지 않는 초월 (transcendence) 의 하나님이라면, 사도행전 26장의 예수님은, 누구나 잡을 수 있고 이해 가능한 (grasp, 각주 1) 존재가 되기로 선택하신 내재 (Immanence) 의 하나님이었다. 예수께서 잡혀 죽으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는 네가 괴롭히는 (박해하는) 그 예수”라고 소개하지 않으셨는가.
잡히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이 열렸다. 바울에게 괴롭힘 당하던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18절 이하의 바울의 사명 단락이 새롭게 읽힌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다. 열방이 빛으로 나아올 수 있는 이유는, 빛이 먼저 어둠에 가운데 비쳤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정확한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참된 사명은 그가 열방에게 잡힐 때, 열방 중에 가장 연약한 자로 판명될 때 가장 확실하게 성취될 수 있다. 힘 없이 재판을 받고 압송되어 가는 바울을 통해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1) Grasp 은 1차적 의미로는 붙잡다의 의미를 가진다. 파생적으로 완전히 이해하다 (마스터하다) 라는 단어를 갖는다.